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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발걸음을 지킨다, 화혜장 황해봉 장인

2015-12-21




황해봉 선생님의 집안은 대대로 신을 만들어왔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근대 이후 최초의 화혜장이자 3대째 가업을 이어간 조선 최고의 신 짓는 장인 황한갑선생님이다. 황한갑 선생님 실력은 그 실력이 궁중에까지 소문나 덕수궁, 운현궁에까지 신을 대었다고 한다. 특히 고종황제의 의례용 신을 만들거나, 명성황후의 국상 때 온 백성이 신을 백혜를 만들었던 기억은 황해봉 장인의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토록 최고의 장인으로서 보냈던 파란만장한 삶은 갑오개혁 이후 고무신과 구두의 범람으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전성기 때 아홉에 이르던 일꾼들은 모두 떠나 황한갑 장인 혼자 남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분업으로 제작하던 일흔 두 번의 신발 제작 공정을 이제는 혼자서 모두 해 내어야 했다. 1900년대 후반이 되자 전통 신을 찾는 사람의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박물관의 전시용 신발이나, 드라마 촬영용 소품으로 신발을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었다. 전통 신의 명맥이 역경을 맞는 순간이었다.

 

 


 

 

황씨 집안의 장인 정신, 그 맥을 잇다


황해봉 선생이 황한갑 선생의 대를 이어 화혜장이 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대학시절에는 화혜장이 될 생각도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야심도 컸고 패기도 있었다. 다른 큰일을 해 보고 싶은 욕심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니면 가업을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할아버지 어깨 너머로 직접 보고 배운 기술을 기반으로 전통 문헌과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전통 화혜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혜장으로서의 황해봉의 삶에는 몇 가지 역경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본래 화혜 기술을 이어받기로 했던 황해봉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인 황한갑보다 먼저 타계한 것이다. 1978년 황한갑 장인마저 타계하면서, 화혜장의 명맥은 대를 잇지 못하고 끊어졌었다. 황해봉 선생이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까지 화혜장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요가 많았던 화혜이지만, 20세기 말이 되면서 화혜는 그야말로 밥벌이가 되지 않는 분야가 되었다. 다른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에는 기술을 가진 장인이 2명 이상이다. 그러나 화혜를 만드는 장인은 현재 황해봉 장인 단 한명이다. 화혜도 판매를 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수요자가 있어야 공급자가 있는데, 수요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젊은이들은 더더욱 화혜를 외면하고, 이전에 화혜를 찾던 수요자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길이 끊어지고 있다. 따라서 황해봉 선생이 스스로 화혜장의 대를 잇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가업을 이을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화혜장이 가족의 생계를 잇기에는 어려운 직업이기 때문이다.

 

 


화혜는 다른 일에 비해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많다. 연장이 가위, 칼처럼 작기 때문에 집 안의 두 평 정도 되는 장소가 작업장의 전부이다. 그렇다보니 일을 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고독이다. 처음 장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에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혼자 작업하면서 끊임없이 인내해야 하는 고비를 넘어서면 나중에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황해봉 장인이 할아버지 황한갑 장인에게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했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를 게야. 그 가느다란 돼지목털에 실을 매겨서 신을 짓는 재미를!”

 

 

 

이 시대의 명품

 

 


유명 상표를 달은 명품 지갑, 명품 가방만 명품이 아니다. 5대째 기술을 이어받고 있는 화혜 역시 우리나라의 소중한 명품 중 하나이다. 섬세한 바느질과 문양을 만들어 내는 기술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화혜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공예 기술을 상품화해보자는 권유를 받은 적도 많다. 대량 생산 방식에 장인의 기술을 접합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해봉은 제안을 거절했다. 장인의 삶은 우직하게 하나만을 보고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혜를 전승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본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장인정신이라고 말한다.

 

 

 

 

황해봉 장인은 예순이 넘었다. 마지막까지 전통 신을 놓지 않았던 황한갑 장인처럼 그는 우리나라 유일의 화혜장으로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 요즘 황해봉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헤아려지고는 한다. 장인들이 하나 둘 일터를 떠나는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세월이 후회스러운 것은 절대 아니다. 황해봉은 결혼 당시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황해봉 장인에게로 이어진 장인의 솜씨로 만든 꽃신을 신겨서 아내를 맞았다. 화혜에 대한 그의 애정은 돈이 조금 안되고, 삶에 조금 찌들지라도 묵묵하게 옆을 지켜준 아내에 대한 사랑만큼 대단하다.

 


이제는 그의 아들이 6대째 가업을 잇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처럼 외로웠으나 근대화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할아버지 황한갑처럼, 황해봉은 꿋꿋이 장인의 길을 걸으려 한다. 그 뒤에는 장성한 아들이 6대의 맥을 잇는다. 외롭더라도 자부심 충만한 장인의 길을 이어가기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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