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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발걸음을 지킨다, 화혜장 황해봉 장인
황해봉 선생님의 집안은 대대로 신을 만들어왔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근대 이후 최초의 화혜장이자 3대째 가업을 이어간 조선 최고의 신 짓는 장인 황한갑선생님이다. 황한갑 선생님 실력은 그 실력이 궁중에까지 소문나 덕수궁, 운현궁에까지 신을 대었다고 한다. 특히 고종황제의 의례용 신을 만들거나, 명성황후의 국상 때 온 백성이 신을 백혜를 만들었던 기억은 황해봉 장인의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토록 최고의 장인으로서 보냈던 파란만장한 삶은 갑오개혁 이후 고무신과 구두의 범람으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전성기 때 아홉에 이르던 일꾼들은 모두 떠나 황한갑 장인 혼자 남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분업으로 제작하던 일흔 두 번의 신발 제작 공정을 이제는 혼자서 모두 해 내어야 했다. 1900년대 후반이 되자 전통 신을 찾는 사람의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박물관의 전시용 신발이나, 드라마 촬영용 소품으로 신발을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었다. 전통 신의 명맥이 역경을 맞는 순간이었다.     황씨 집안의 장인 정신, 그 맥을 잇다 황해봉 선생이 황한갑 선생의 대를 이어 화혜장이 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대학시절에는 화혜장이 될 생각도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야심도 컸고 패기도 있었다. 다른 큰일을 해 보고 싶은 욕심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니면 가업을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할아버지 어깨 너머로 직접 보고 배운 기술을 기반으로 전통 문헌과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전통 화혜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혜장으로서의 황해봉의 삶에는 몇 가지 역경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본래 화혜 기술을 이어받기로 했던 황해봉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인 황한갑보다 먼저 타계한 것이다. 1978년 황한갑 장인마저 타계하면서, 화혜장의 명맥은 대를 잇지 못하고 끊어졌었다. 황해봉 선생이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까지 화혜장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요가 많았던 화혜이지만, 20세기 말이 되면서 화혜는 그야말로 밥벌이가 되지 않는 분야가 되었다. 다른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에는 기술을 가진 장인이 2명 이상이다. 그러나 화혜를 만드는 장인은 현재 황해봉 장인 단 한명이다. 화혜도 판매를 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수요자가 있어야 공급자가 있는데, 수요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젊은이들은 더더욱 화혜를 외면하고, 이전에 화혜를 찾던 수요자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길이 끊어지고 있다. 따라서 황해봉 선생이 스스로 화혜장의 대를 잇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가업을 이을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화혜장이 가족의 생계를 잇기에는 어려운 직업이기 때문이다....
국악, 내 삶의 뿌리 - 악기장 조준석
햇살 부드럽게 내리는 뜰에 홀로 선 오동나무. "아내가 심어 놨는데 어느새 저렇게 자랐네요"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만난 조준석 장인이다.그는 영동의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평생의 업으로 가야금과 해금 등, 50여종의 다양한 국악기를 만들고 있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19호 악기장(樂器匠)이다.       조선 초 문신이며 음악가로 이름난 난계 박연의 고장 영동.  우리악기를 만들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며 난계국악기제작촌과 국악기체험전수관, 난계국악박물관 등이 있어 다양한 형태의 국악이 흐르는 곳이다. 그곳에 조준석악기장의 손길이 있다.      난계국악기제작촌 작업실에서 12줄 가야금의 현을 만지는 그의 손길은 섬세하고 눈빛은 깊다. 오동나무 공명판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12줄을 매고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면 애절하게 울리는 소리. 가야금 12현의 미세한 떨림까지 읽어내는 눈빛이다.        전북 장수의 국악인 집안에서 7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나 열일곱 살 때부터 국악기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고 35년째 이 길을 걷고 있다.        거문고, 해금, 장구, 북 등의 다양한 전통악기들이 늘어선 작업실에서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그는 말한다.       "옛 가야금은 수령이 오래되어 굵은 오동나무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내고 그 위에 12줄을 얹었지요. 그러다가 200년 전부터는 앞판은 오동나무로 하고, 뒤판은 밤나무를 붙인 방식으로 가야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수령이 오래된 오동나무 구하기는 힘들어지고, 전통을 지키면서도 실용성을 높일 수 있는 국악기의 개발이 절실했지요."      국악기 대중화를 위한 그의 생각은 끊임없는 연구로 이어졌다. 그 결과 구하기도 힘들고 고가인 오랜 수령의 통 오동나무를 대체할 목재로 좋은 공명통을 얻게 되었고,연주자가 가야금의 현을 쉽게 조율할 수 있는 장치도 개발하여 특허 출원 중이다. 국악에 대한 그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06년부터 몽골의 테무진 민속단을 비롯한 전북 교육청 등 5개의 교육기관 및 단체와 업무협약을 체결하였고, 2013년에는 영동 초강초등학교와도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협약을 체결한 단체와 학교엔 사물악기, 가야금 등의 국악기를 기증하였고 학교 학예활동지원과 국악의 저변확대에도 힘쓰고 있다.    2013년에 산학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한 몽골 국립음악무용학교 관계자들은 영동을 직접 찾아 난계국악관련시설을 둘러보았고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대패작업, 인두작업, 현작업, 줄 메우기 등의 한국 전통국악기 제작체험을 하기도 했다.    난계 박연선생의 얼을 이어받아 국악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국악의 대중화로 곳곳에서 우리의 소리가 들리길 바라는 조준석 장인은 "누구라도 국...
조선백자, 그 아름다움을 탐하다 - 사기장 이종성
흙 사이로 연초록이 빛나고 부서지는 햇빛이 은빛 물고기처럼 반짝이는 강변을 달려 충주시 엄정면의 도예촌을 찾았다.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0호(사기장) 이종성장인의 집에 들어서니, 작업실과 전시실 벽을 따라 쌓여 있는 소나무 장작들이 먼저 반긴다.눅눅한 물욕의 습기를 거두고 예술혼의 화력을 높일 장작들이다.고운 흙처럼 드러내지 않는 성품의 이종성장인은 1974년 열여섯 나이에 도자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일을 배워 갈 무렵, 몇몇 사기장들은 흙을 만지는 일과 무늬를 넣는 일 등의 작업을 각각 분업화하여 대량생산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다 해야 해"라는 말의 뜻을 고민하였고, 이를 계기로 경기 광주의 안동오 선생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전통도예를 배우게 된다.안동오 선생 문하에서 보낸 8년여의 시간은 도자기에 대한 그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흙을 고르는 일부터 물레질과 문양을 넣는 일, 가마에 장작으로 불 지피는 것까지의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해야 내 이름을 새길 수 있지요." 라는 말에서 장인의 고집스런 집념이 배어난다.  흙과 물, 바람과 불, 장인의 묵묵한 세월을 담은 청화 백자는 생명의 숨결로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름답게 만드는 신비함을 지녔다.     전통도예에 온 힘을 쏟으며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 등의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그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청화백자 투각이었다.하나의 도자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수십 차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드러운 질감을 살리기 위해 전통방식으로 직접 손으로 흙을 반죽하여 원하는 형태로 빚는다. 성형을 마치면 도자기에 공간을 부여하는 독특한 문양인 투각을 한다. 숨을 참아가며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고된 작업이다.예술적이고 독창적인 투각을 위해 수없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었다.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묘사할 대상의 윤곽을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구멍 내 파내고 무늬를 넣는 투각부분에서 그의 솜씨는 뛰어나다.대한민국 미술대전 공예부문에서 상을 받은 '청화백자 장생문 투각대호'도 투각 작품이다.      이종성 장인은 가마와 불도 전통방식을 고집한다.여러 단으로 만들어진 전통 흙 가...
종이와 대나무가 주는 맑은 바람 - 접선장 김대석
전남 담양에서 3대째 전통을 이어온 접선장 김대석   전남 담양에서 3대째 전통을 이어온 김대석 명인은 접선(쥘부채)장이다. 담양군 만성리는 예로부터 부채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중국산 저가 부채와 기계가 도입되면서 마을 내 대부분의 접선장이 사라졌고 김대석 명인만이 홀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김씨의 부채 만드는 기술은 그동안 향토무형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돼 보존되어 오다 2010년 전남도가 무형문화재 제48호 선자장(扇子匠)과 제48-1호 접선장(摺扇匠)으로 추가 지정하면서 전승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50여 년간 부채를 만들어온 김씨는 아버지와 함께 1980년대까지 1년에 10만여 개의 부채를 만들어 팔았다. 김씨는 “먹고살기가 힘든 때여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며 “선대의 뿌리가 남아 있는 고향에서 가업을 이으며 살고 있는 것이 보람”이라고 말한다.   쥘부채는 겨울부터 부채에 쓸 초지를 준비하고 다듬고 말리며 색을 입히는 과정을 기계의 도움 없이 오로지 손으로 작업한다. 부채 하나를 만들려면 다섯 단계를 거치는데, 먼저 초지방에서 대를 썰어 쪼갠 뒤 깎고, 정면방에서 깎아놓은 초지로 부채 몸통을 제작한 뒤, 사복방에선 부챗살에 구멍을 뚫어서 철사로 사복을 박는 과정을 거치고, 한방에선 종이를 재단해 접는다. 마지막으로 도배방에서 한지를 붙이는 다섯 개의 방을 거쳐야 한다.  김씨는 아내 정명순(55)씨와 오방을 돌며 손작업을 한다. 한량무를 추는 춤꾼들의 부채, 남사당패의 줄타기용 부채, 무속인이 사용하는 부채 등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김씨의 공방에서만 생산된다. “어떻게 세월이 흘러왔는지 모르지라. 자고 깨면 오로지 부채만 만들었으니께요.”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 ‘종이와 대나무가 만나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라는 부채의 뜻처럼 사람들에게 맑은 바람을 전하는 보람에 산다는 김씨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쥘부채 만드는 법을 알리고 서민용 부채를 제작하여 전통을 잇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펼친다.    담양=사진·글 탁기형 선임기자    
남은 여생 흙과 함께 하고픈 - 옹기장 박재환
충북 청주시 오송읍 봉산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옹기장 박재환옹의 옹기점...건강식품으로 효소가 각광을 받으면서 효소 담그는 데 쓰이는 옹기의 인기도 치솟고 있지만 박재한옹의 옹기점은 철거 위기에 놓여 내일을 알 수 없다.오는 2018년까지 청주시 오송읍 일대 328만 제곱미터 부지에 제2생명과학단지를 만든다는 계획에 따라 충청북도가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11살 심부름꾼에서 일류 도공으로...박재환옹이 독 짓는 일에 뛰어든 것은 11살 때다. 아버지 박원규(1908~1942)씨가 일본 탄광으로 강제징용을 갔다 폭약사고로 왼쪽 발목을 잃고 1941년 귀국한 뒤 물레를 밟지 못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서다. 당시 아버지는 재혼한 부인과 장인, 장모까지 모시고 살았던 터라 가족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새어머니는 물동이와 자배기(둥글넓적한 질그릇), 뚝배기 할 것 없이 머리에 겹쳐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았다. 박재환옹도 두 살 위의 형과 옹기 공장에 들어갔다. 잡일을 돕고 첫 임금을 받아 된장과 간장을 샀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공장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옹기 뚜껑을 만들었고, 15살 때는 그 어렵다는 '똥장군'을 척하니 구워냈다. 똥장군은 거름으로 쓸 인분을 모아두는 높이 60센티미터(cm) 정도의 항아리로, 흙을 휘는 까다로운 작업이 많고 제작 과정에서 옹기가 주저앉기 쉬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심부름꾼으로 들어가서 낮에는 허드렛일 허고 저녁에는 등잔 불 켜 놓고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연습했던 겨. 주경야독을 한 셈이지. 똥장군을 한 6백 개 만들고 나니까 그때야 제대로 된 걸 만들 수 있겠더라고. 그러니께 한 달에 쌀 두 말 받고 시작한 일이 몇 년 만에 쌀 두 가마니 받고 일 헐 정도가 된 겨.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 일류 기술자가 된 겨."박재환옹은 25살에 같은 마을 출신 김정순(1933~2008)씨와 결혼한 뒤 기술을 더 배우려고 전국 옹기 고수들을 찾아다녔다. 첫 해인 1958년에는 충북 보은군 송평리 옹기공장에 들어가서 가마 온도를 600~700℃로 유지해 옹기가 깨지지 않게 하는 기술을 배웠다.이듬해부터는 경기도 용인시 삼계리 옹기공장에서 점토를 고르고 풀어 정제하는 법을 3년 동안 배웠다. 경기도 안성시 양협리와 옛 충남 연기군, 인천시 경서동 등 내로라하는 옹기 공장을 다 찾아가 손에서 손으로만 전수되던 비법들을 열심히 익혔다.&n...
느긋함, 여유 손재주를 만나다 - 우주먼지 주꾸미
느긋함, 여유로움, 손재주가 만나 만들어지는 주꾸미님의 작품 그리고 재기 발랄한 소개 글을 주신 주꾸미님을 만나보세요. 전공을 뛰어 넘은 나의 손재주!안녕하세요! 세상은 느긋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꾸미라고 합니다:) 취미 겸사겸사 만들던 악세사리로 이렇게 <메드인손>에 입점도 하게 되고 정말 앞일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전공보다도 수공예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나름 잘하기도 합니다. 자랑은 아니고 실제로 전공보다 더 괜찮게 하는 거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주변에선 이런 저를 보고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ㅎㅎ... 사실 다른게 아니라 저는 앉아있는 걸 좋아해서 이런 거 같기도 합니다. 저만 이렇지 않다고 장담합니다. 어디에나 저 같은 사람은 한 명쯤 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저는 짧게 다시 소개하자면, 궁디(엉덩이) 무거운 근거 없는 여유로움의 소유자입니다!  커뮤니티를 보고 신기함에 따라 하게 된 수공예...커뮤니티에서 원석 팔찌를 보게 되면서부터 수공예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쁘기도 했고 저걸 만든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어디서 재료를 사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여기저기 뒤져보고 다니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만들어보니 생각만큼 안 예뻐서 실망도 하고 했습니다. 그래도 원석 팔찌 만드는 사람들 모두 이런 말을 하죠. ‘원석 팔찌를 만드는 건 개미지옥이다.’왜냐하면 늘 재료가 애매하게 남으니 마저 처리하려 다시 재료를 사고 또 남고 사고 남고 사고의 반복이죠. 참 웃긴 건 그렇게 만든 건 많지만 내 손안에 남아있는 건 많이 없다는 겁니다. 이상하게 선물하고 싶어져 여기저기 선물로 다 주고 합니다. 시작은 원석 팔찌였지만, 저는 제 절망적인 센스에 좌절하고 끈 팔찌로 관심을 옮겼습니다. 원석팔찌보다는 디자인이 쉬울 거라 생각하며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만만치 않았습니다. 원석팔찌는 기본적인 형태가 있지만, 끈 팔찌는 형태가 너무 무궁무진해서 어디에 뭘 넣고 어떻게 만들지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늘 디자인에 골머리를 앓지만 만족스러운 제품이 나오면 여기저기 자랑하고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늘 만족스러운 제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기도 합니다.  고민과 노력 끝에 나온 작품들...
평생친구이자 천직인 채상 - 채상장 서신정
전라남도 담양하면 사계절 푸른 대나무의 자태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관광명소이자 죽공예품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제품 생산지이자 집산지인 담양에서 자란 사람들이 죽세공품 제작기술을 익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비출 수 없는 삶의 애환도 함께 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중요무형문화제 제53호인 채상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최근 들어 ‘채상’이 뛰어난 예술성과 견고함을 바탕으로 명품 살림살이의 하나로 인기를 끌면서 전통의 맥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는 ‘채상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채상을 통해 전통공예의 맥을 잇고 제2대 장인인 서한규 선생의 뒤를 이어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서신정 장인이 채상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후진 없는 전진만을 추구하며 홍보와 연구에 매진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비단처럼 고운 대나무 상자 ‘채상’ 채상은 죽세공품의 일종으로 ‘색이 있는 상자’ 또는 ‘비단처럼 고운 대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채상장은 이러한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합니다. 채상은 대나무를 종잇장처럼 얇고 가늘게 쪼개서 꽃자주, 노랑, 녹색 등으로 염색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배합하여 만든 상자로 염색을 한 대오리로 짠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죽세공예품 중에서 가장 정교한 세공을 요하는 것이 채상이에요. 채상은 대를 가늘게 오린 대오리에 색색의 물을 들여 세올뜨기로 여러 가지 무늬를 수놓 듯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죽세공예품의 정수라고 할 수 있어요”라며 “채상장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천직”이라고 소개하는 제3대 보유자로 인정된 서신정(56세, 여) 장인. 서 장인은 제2대 서한규 명예보유자의 제자이자 딸로 다양한 작품 제작과 전승 활동으로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되어 전통의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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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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